길종갑 : 향연 饗宴
Gil Jong-gab : The Celebration
2024. 5. 04 - 5..31
화천 사내면 비닐하우스
기획 : rosa, 한동국
사진, 영상, 디자인 : 김효주
강연 : 권혁진, 박응주
주최주관 : 개나리미술관
화천의 화가 길종갑은 60갑자 한바퀴를 돌아 온 생의 한가운데에서 전시를 개최한다. 이번 전시는 30여 년간 지속해온 그의 화업을 되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모색하는 자리다. 특히 작가의 삶의 터전이자 생업의 기반인 토마토 농장의 비닐하우스를 전시 공간으로 삼았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전시장에는 작품뿐만 아니라 온갖 작물들이 함께 자라며, 삶과 자연의 경계를 허물고 예술의 영역을 확장한다.
전시는 초기작 세 점에서 시작해 ‘사창리 사람들’, ‘곡운구곡’, ‘이상한 풍경’, ‘사라진 것을 찾는 사람들’로 이어진다. 모든 작업의 중심에는 ‘엄마의 정원’이 자리하며, 이는 작가가 지속적으로 탐구해온 주제와 맥락을 조망할 수 있도록 구성되었다. 전시장 입구 한가운데에는 육십갑자 한 바퀴를 상징하는 원형 광장이 조성되어 관람객들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는 마당이 된다.
이선영평론가는 “길종갑작가에게 고향은 단순히 여러 지역 중 하나가 아니라, 세상의 중심이다.”고 언급한 바 있다. 이번 전시는 바로 그 중심에서 펼쳐지는 길종갑의 삶과 사람, 풍경을 펼쳐놓은 그림의 '향연'이다.
사창리사람들
화천 사창리는 작가의 고향이자 60년 가까이 살아온 삶의 터전이며, 작품 속 등장인물들은 작가 본인과 가족을 비롯해 고향의 사람들이다. 거칠고 생략된 표현 방식으로 인해 인물들을 특정하기는 어렵지만, 하나하나 실제 모델이 존재한다. 대부분의 그림들을 일기를 쓰듯 기억으로 그리며, 캔버스의 뒷면에 그림의 장면을 글로 담아 남겨둔다.
그는 자신과 작품 속 인물들을 단순히 순박하고 선량한 농촌 사람들로 포장하지 않는다. ‘사창리 사람들’은 때론 비틀리고 기괴한 느낌을 준다. 점차 사라져가는 풍경인 이발소, 방앗간, 종묘사에서부터, 농사일하는 모습들, 소주 한잔에 외로움을 달래는 노인, 마을회의에서 서로 다투는 주민들까지—작가는 이러한 일상을 표현주의적 필치로 그려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인물들의 해학적인 캐릭터와, 드라마틱한 상황들이 전하는 생생한 고향의 모습을 만날 수 있다.
곡운구곡
길종갑은 고향의 현재를 넘어 먼 과거까지 본다. 사창리 자체가 조선시대부터 창고가 있었던 곳으로, 군사적 요충지이자 은둔지이기도 했던 기록문화의 보고다. 특히 ‘곡운구곡’이라는 명칭은 1668년 강원도 평강 감사로 부임한 김수증이 이 지역의 빼어난 경치를 보고 은퇴 후 정착하면서 자신의 호를 따 ‘곡운구곡’이라 명명한 데서 비롯되었다. 김수증은 화가 조세걸에게 실경을 바탕으로 한 「곡운구곡도」(1682)를 제작하게 했으며, 이는 오늘날까지 전해진다.
길종갑의 ‘곡운구곡’은 이 땅의 내력과 역사, 풍모와 영성을 드러내려는 시도다. 그는 권혁진 한문학자와 함께 오랜 기간 답사와 고증을 거쳐 기록한 그림에서부터,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곡운구곡의 실재를 형상화하였다. 유려한 계곡의 암석을 유출하려는 무리들을 막기 위해 마을 이장을 자처한 적도 있는 작가의 품성을 보듯, 곡운구곡은 단순한 그림의 대상이 아니라 현실 속에서 지키고 보존해야 할 삶의 터전이기도 하다.
이상한 풍경
사창리사람들이 미시적인 삶의 풍경이라면, 이상한 풍경은 9m가 넘는 작품 등 대작들로 구성된 거시적이고 역사적인 시대의 풍경이다. 단기적 이익을 위해 무조건 파헤치는 것이 일상화된 시대에,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삶을 추구하는 작가 눈에는 그 모든 것들이 이상한 풍경들이다. 그는 자연 또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성한 땅을 소수에게 귀결될 이익의 대상으로 삼는 권력에 저항한다. 과거의 선비와 현재의 사람들, 훼손되는 자연, 시대의 아픔 등을 거침없이 화폭에 담으며, 사라져가는 낙원을 지키고자 한다.
사라진 것을 찾는 사람들
작가는 작업 초기부터 사라지는 것들에 주목해 왔다. 전통적인 방식으로 치룬 동네 장례식을 기록한 <장삿날>, 산신제와 과거 축제를 기록한 < 용화제>, <산치성> 등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살아왔던 옛 모습을 담은 작업들을 지속해오고 있다. 이를 통해 지금 현재의 삶에서 우리가 과연 잃어버리고 사는 것은 무엇인지 되묻게 한다.
엄마의 정원
길종갑에게 고향은 우주의 중심이 투영된 곳이다. 그 마을 한가운데에는 어머니의 정원이 있는 집이 자리한다. 어머니와 함께하는 일상, 그 곁에서 살아가는 작가 자신, 어머니가 가꾸는 ‘진짜’ 정원이나 화분, 그리고 높은 산들에 둘러싸인 대자연 속의 삶 그 모두가 어머니의 정원인 것이다.
작가는 우리 나이로 아흔인 어머니를 돌보기 위해 몇 년간 집을 떠나지 않았다. 그의 분신이자 세상을 보는 시각을 물려준 어머니의 존재는 이번 전시 <향연>을 낳게 하였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함께 농사를 짓던 이곳 비닐하우스에서 아흔의 어머니와 환갑의 아들이 들려주는 생생하게 살아있는 삶의 이야기를 만나보길 바란다.
정현경 큐레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