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효창 : 아무데도 없는 나라
Hwang Hyo-chang : Neverland
2024. 9.06-9.28
디자인.기획 : rosa
강사 : 이유미
작품설치 : eastsoup, 이인기
사진 : 이수환
작가 황효창은 1945년 춘천에서 태어나, 1988년 고향으로 돌아온 이후 지금까지 춘천에서 거주하며 창작 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홍익대학교에서 서양화를 전공한 그는 동시대 주류 작가들과는 다른 독자적인 길을 걸으며, 자신만의 예술세계를 구축해왔다. 이번 구술작업과 아카이브를 토대로 그의 시기별 작품 경향을 고찰하고 강원지역의 미술사, 더 나아가 한국 근현대미술사에서 그가 지니는 의의를 조명해 보고자 한다.
황효창은 1970년대 초부터 중반까지의 '에스프리' 그룹에서의 모색의 시간을 거치며,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확립하게 된다. 이후 그의 작업은 크게 세 시기로 나눌 수 있으며, 각각의 시기는 그의 작품 세계의 변화를 반영하고 있다.
첫 번째 시기는 에스프리 이후 인형그림이 등장한 1974년부터 1990년까지의 작품을 아우르며, 사회적 억압과 불평등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중심을 이룬다. 두 번째 시기는 2012년까지로, 자연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며 미술의 대중화를 시도하는 시기이다. 마지막 세 번째 시기는 2013년부터 현재까지로, 다시 사회적 메시지에 주목하며 저항의 목소리를 담은 작품들로 이어진다. 이러한 시기 구분을 통해 황효창의 작품 세계를 보다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그의 예술적 발전과 변화의 흐름을 조망해보고자 하였다.
모색 : 에스프리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초반, 68혁명과 반전운동 등의 국제적인 흐름 속에서 보수화된 기성세대의 형식주의 모더니즘에 반발하는 ‘실험미술’의 장이 펼쳐졌다. 1970년대 한국 미술계는 국전의 영향력이 약화되고 민전 시대가 열리면서, 젊은 예술가들의 실험적 작품 활동이 활발해지고 있었다. 특히, 1960년대 후반부터 등장한 ‘청년작가연합회’, ‘한국아방가르드협회(A.G.)’ 등이 추상표현주의를 넘어선 다양한 실험을 전개하였고, 1972년에는 한국미술협회가 《앙데팡당전》을 신설하여 신진 작가들에게 새로운 무대를 제공하였다.
청년 황효창 역시 군 제대 후 이와 같은 흐름 속에 《앙데팡당전》에 동참하는 동시에, 홍대 학우들과 함께 1972년 ‘에스프리’를 창립하고 예술의 장르적 구분을 넘어선 다양한 활동을 개진하였다. 필리핀 참전비, 홍대 운동장 등지에서 기성세대에 도전하는 해프닝 등 도발적인 실험들을 협업하고 시연하였다. 또한 다다, 플럭서스 같은 서구의 경향을 참고하면서도 장자, 도가 사상을 학습하며 한국적 상황에 맞는 독자적인 연구를 병행한다. 1974년 4회전으로 ‘에스프리’가 막을 내릴 때까지 황효창은 오브제를 이용한 설치 및 개념적 작업에 한동안 매진하며 예술에 대한 물음을 토대로 한 작업을 지속하였다. 유신정권의 감시 속에 1970년대 중반 이후 미술계는 ‘단색화’로 대변되는 평면으로 회귀하는 회화가 대두되기 시작한다. 그 시기 청년 황효창은 서구 경향을 모방하는 것에 의문을 품고 자신만의 길을 모색해 나갔다.
감기시대 (1974-1990)
1970년대 초부터 에스프리 활동을 통해 다양한 실험미술의 경향을 시도하였던 작가는 스스로 구하고자 하는 해답을 얻지 못한 후, 평면회화 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한다. 서사적인 회화를 구태의연한 것으로 여기는 분위기 속에서, 그는 암울한 시대적 상황을 회화적으로 대변할 대상을 찾았고, '인형'을 소재로 독자적인 이야기를 담아내는 방식을 선택하였다.
황효창은 79년, 81년 태인화랑에서 열린 두 번의 전시를 통해 점차 주목받기 시작했다. 인형에 눈물을 그려 넣으며 시작된 그의 인형그림은 이후 ‘현대풍속도’라는 주제로 확장되어 갔다. 초기 작업에서는 하나의 작은 인형이 자화상처럼 등장하며 소극적인 표현을 보여주었으나, 점차 다수의 인형들이 풍경 속에 등장하는 작품들로 발전한 것이다. 공장지대나 도시환경 속에 널브러진 모습으로 그려진 인형그림은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과 인간소외에 대한 알레고리였다. <눈먼 사람들 동네>(1985)는 홍대 와우산 판자촌에 대한 기억을 바탕으로, 눈이 가려진 인형들을 통해 억압된 사회를 은유적으로 그려냈다.
무엇보다 황효창의 인형그림의 형상성과 시대성이 대두되었던 전시는 1985년 한강미술관 개인전이다. <감기시대>, <80년대 감기> 등 그의 대표작들이 이 전시를 통해 대거 공개되었다. <감기시대>는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시작된 연작 중 하나로, 작가는 군부독재 하에 병든 사회를 ‘감기시대’로 명명한다. 마스크를 쓰고 입이 막혀버린 인형들은 본인의 적극적인 의사 표현을 잃은 채 황량한 세상에 내팽개쳐 있다. 일렬로 서 있는 인형들은 전라에 눈이 멍든 인형에서부터 허리춤에 총을 차고 있는 인형 등 마치 각각의 사회적인 서열을 상징하는 듯 보인다. 작품은 ‘감기시대’에 사는 모두가 병들고 아파함을 의미하고 있으며, 수동적이고 유약한 사물인 인형에 시대적 인간상을 빗대는 그의 작업은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1990년 선갤러리에서 처음으로 선보인 '술취한 광대'의 등장은 그의 작업에 있어 중요한 변화를 의미하였다. 광대는 인형과 달리 움직임을 내포하고 있으며, 마임과 같은 퍼포먼스 예술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뒤집어쓴 가면은 정체성을 감추고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상징적인 도구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존재로서 불안감을 자아낸다. 특히, 마임을 하는 광대의 손짓은 마스크로 입을 막은 인형처럼 허우적대는 몸짓으로 침묵의 저항을 상징한다.
여기에는 황효창의 트레이드마크인 왼손과 오른손이 바뀌거나 안과 밖이 뒤집힌 손의 형상이 자주 발견된다.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해석해 본다면 ‘신체의 가역성’ 이라는 개념과의 연관성을 찾아볼 수 있다. ‘신체’는 세계를 지각하고 만나는 매개체이며 타자와 주체가 전환되는 상호작용이 벌어지는 장이다. 그의 작품에서 역전된 손의 위치는 그 역할이 전환됨으로써, 작가와 대상, 혹은 작품 속 인형과 관객 사이의 상호작용을 불러일으키는 새로운 지각의 경험을 제공한다. 말을 잃어버린 인형의 ‘손’은 세상과 유일하게 교환할 수 있는 소통의 형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불완전하고 뒤틀린 형상이 주는 메시지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아무데도 없는 나라 (1991-2012)
‘인형극제’와 ‘마임축제’의 고장 춘천으로 돌아온 황효창은 ‘광대’뿐 아니라 자연, 동물, 신화 등 다양한 소재의 변화와 함께 전환의 시기를 맞게 된다. 그는 경쟁과 혼돈의 서울을 떠나 오월리 깊은 숲속에 집을 짓고, 자신만의 ‘나라’를 그림 속에 실현하였으며 ‘아무데도 없는 나라’라고 명명하였다. 아무데도 없는 나라는 유토피아를 뜻하는 네버랜드(Neverland)를 의미하지만, 동시에 부조리한 현실을 환기시키는 역설적 표현이다. 도시의 풍경 위로 날아다니는 인형들, 거대한 신화적 동물 아래에 누워 있는 여인, 혹은 광대를 묘사한 작품들은 태초의 신화와 역사에 대한 그의 깊은 관심을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상상들은 춘천의 자연환경 속에서 구체화 되었으며, 자연과 인간, 동물 등 모든 존재들이 위계 없이 함께하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었다.
그가 2001년에 발표한 작품인 <상생도(相生圖)>는 그가 추구한 자연과의 소통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다. 이 작품은 무덤의 봉분 위로 자라난 나뭇가지에 동물, 식물, 심지어 휴대폰과 같은 무생물까지 함께 돋아나는 형태로 구상되었다. 인간 중심적인 세계관에서 벗어나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강조하는 작업이다. 인간과 자연, 동물, 식물, 그리고 무생물까지도 상호작용하고 영향을 주고받는 복합적인 존재임을 시사한다.
이와 함께 시대와 지역성에 대한 고민을 토대로 1992년, 조각가 박희선과 함께 '아침못'을 결성한다. 백윤기, 길종갑, 이광택 등이 함께 참여한 이 그룹전은 강원지역의 ‘민중미술’ 태동이라는 측면에서 지역미술사에 의미하는 바가 크다. 이후 작가는 민족미술인협회 강원지회와 춘천지부를 창립하는 등, 지역 미술계와의 긴밀한 연계를 통해 미술의 대중화와 강원지역 미술운동을 이끌어 갔다.
황효창은 특히 ‘민족미술’에 대해 "생활 속에 있는 예술, 우리 삶 속에 있는 예술"이라는 개념을 강조하였다. 그는 미술이 대중과 괴리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누구나 접근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인식을 전달하고자 했으며, 이러한 시도는 그가 추구한 예술의 본질적 방향성을 보여준다.
할많하않 (2013-2024)
춘천 오월리를 기반으로 자연과 상생하는 삶을 추구하였던 작가는 2010년대 중반 이후 또 한번의 변화의 시기를 겪게 되었다. 특히 2014년 ‘세월호 참사’에 대한 슬픔과 분노는 1980년대에 처음 등장한 피켓과 흰색 띠를 두르고 ‘시위에 나선 인형’들을 다시 소환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칠순을 기념하는 개인전,《나는 인형이다》에서는 촛불을 든 인형, 시위하는 인형 등 총 70점의 작품들이 출품되었다. 1980년대 처음 등장한 시위하는 인형들은 어떤 특정한 구호도 적혀 있지 않은 무언의 항거를 상징하였다. 당시에는 작은 인형이 홀로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 커다란 피켓을 들고 있었으나, 2014년 개인전에서는 수많은 인형들이 가담하여 전시장을 가득 채웠다. 여전히 비어 있는 피켓과 구호가 적히지 않은 흰 띠를 두르고 있지만, 촛불을 들고 관객을 응시하는 그들의 시선만으로도 강력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황효창의 작품이 사회를 고발하고 비판하였던 ‘민중미술계열’과는 조금 다른 평가를 받았던 이유는, 화가로서의 개인이 느끼는 공감을 토대로 사회를 경험하고 은유적인 방식으로 표현하고자 하였던 작가의 심성에 기반하였기 때문이다. 문학에 비유하자면, 그의 작업은 장황한 '산문'이 아니라 함축적인 '시'에 가깝다. 1990년 선갤러리 개인전 서문에서 언급한 최돈선 시인의 글도 이를 뒷받침 한다. “황효창은 민중예술가가 아닌 민중예술가다. 이 말은 앞의 민중예술가가 추구하는 전체로서의 민중이 아니라, 민중 하나하나의 슬픔과 고독을 드러내고자 하는 민중예술가이다.”
2015년, 황효창은 최형순 평론가, 길종갑, 황재형 등과 함께 강원의 형상미술을 표방하는 ‘산과함께'를 창립한다. 작가의 화업을 통틀어 ‘우리의 것’에 대한 학습과 표현 방식을 연구해 온 그에게, 우리 역사와 지역성을 함께 고민하며 시대적 현실에 대해 발언하는 작가들과의 협업은 예총과 민예총으로 나뉘어 있던 지역 미술계에 굵직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산과함께’동인들과 추구하였던 ‘형상미술’에 대한 논의는 1980년대로 거슬러 갈 수 있으며, 한강미술관에서 진행된 개인전(1985)이 시사하는 바가 크다. ‘현실과 발언’ 그리고 이후 진행된 민중미술의 흐름이 시작되기 전, 서사성 있는 작가의 인형 그림이 있었다는 점은 민중미술 초창기, 황효창의 인형 그림을 시대적 맥락에서 재해석할 필요성을 환기시킨다.
나가며
생사의 기로에 설 만큼 악화되었던 건강이 회복된 후에도 황효창은 화가로서의 정체성을 잃지 않았다. 다시 붓을 든 그는 코로나19의 창궐로 현실이 된 ‘감기시대’에 <불통>을 그렸으며, 팔순을 맞이한 2024년에는 실명된 오른쪽 눈 대신 왼쪽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화가로서의 <자화상>을 완성하였다.
김준기 평론가는 그에 대하여 “칠순을 넘긴 예술가들은 대부분 자신의 미술형식 자체에 주목하여 도돌이표 자기복제를 반복하기 십상인데, 황효창의 경우, 현실에서 벌어지고 있는 역사적 사건을 주제로 현실 속에 화가로서의 길을 걷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언급한 바 있다.
‘지금 현재, 여기’의 삶 속에서 화가로서의 눈과 정신을 또렷이 하고 정진하는 황효창에게, 우리는 남은 인생에서 탄생하게 될 대표작들을 여전히 기대한다. 그 후에서야 비로소 그에 대한 연구와 아카이브가 완성되고, 제대로 된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이다.
정현경 (개나리미술관 큐레이터)